소멸세계: 멋진 신세계와 다른 의미로 신세계, 그리고 편협한 표현.
요약
「섹스」도「가족」도 세계에서 사라진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고, 부부간 섹스를 근친상간으로 터부시한 세계.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남성이 전쟁터로 징용되면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든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섹스를 통해 아이를 낳지 않고, 결혼도 프로그램에 원하는 조건을 넣으면 ‘매칭’시켜주는 상대와 하며, 아이는 인공수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비 내리는 여름날 태어난 주인공 아마네(雨音)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인공수정이 아니라 ‘남다른 방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로 왜 엄마는 ‘교미’를 해서 자신을 낳은 건지, 자신의 진짜 본능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마네는 사랑과 섹스에 몰두한다. 과연 그녀가 찾아낸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소감
리디북스 무료 60일 ebook 대여로 읽게 된 소설이다. 길이도 생각보다 짧고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 편인데, 일본 소설 특유의 전개는 느껴진다. 하지만 말이 많지 않으면 1인칭 혼동도 적기 때문에 이 정도의 구성이면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은 있지만 관계 파트너가 아닌 건조한 사이가 정상이 되고, 끈적한 사이는 밖에서 일시적으로 벌어지는 것으로 몰아낸 세계. 그런 것에서 과거와 현재, 심지어 다가올 미래도 실험 도시를 통해 느껴본 아마네에게는 (그리고 이 불친절한 소설에 당혹스러운 독자에게도) 혼란만 낳을 뿐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작중 인물 주리가 짚어준 의견이 있다.
“누구나 진화의 과정에 있는 동물일 뿐이야. 세상의 상식과 부합하든 하지 않든 우연에 불과하고, 다음 순간에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어지는 것이지”
이것은 마치 원시 시대에서 우리가 화장실을 분리하고, 냄새나는 것들을 집에서 멀리해왔던 지금까지의 발전과 같은 것으로, 그게 끝을 향해간 모습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섹스가 생산과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 오락으로 끝나는 것일 줄만 알았는데, 심지어 파트너도 없이 조용히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지기에 이른다. 파트너가 없으니까 마지못해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만족하게 되어 버리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세계는 과연 진보한 세계인가.
소멸세계, 서두에서 꺼낸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과 통하는 제목이 느껴지는데, 포커스를 딱 가족으로 옮김으로써 인간성의 해체가 극대화되는 느낌이 든다. 실험 도시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몰개성한 모습은 정부가 요구하는, 문제 없는 무난한 사회를 위한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또 남녀 무관하게, 심지어 동성끼리여도 아이를 갖는데 문제가 없고 철저히 공동 양육으로 넘어간 뒤라면, 전통적인 남녀 구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막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아이가 나왔지만, 이 사회가 발전하면 생물학적 성 자체가 없어지게 ‘진화’하는 것인가, 그런 재미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하고 탄식이 나왔다.
우리의 움직임과 올바름이 미래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항상 희망적으로만 생각해왔고, 불행은 자원 고갈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가 그렇듯이, 무난한 평화와 번영 속에 자리잡은 무의식이 사회를 예기치 못한 인간성 말살로 잇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그걸 논하기에 이 책이 충분히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히트작 «편의점 인간»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에 쓰여진 작품인 만큼 미숙한 부분이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작중 인물들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궁리만 하지 그 이유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감성적인 여성의 관점이 매우 깊이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으로, 이미 변하기 시작한 뒤에 깨닫기엔 늦을 가치관의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