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맞이 명소가 어딥니까

집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유튜브 스트리밍은 많습니다만, 일본에서 그런 곳이 많지 않기도 하고 현과 현 사이 이동을 자제해달라 이런 정도의 당부만 있을 뿐 큰 제약이 한국처럼 있는 것은 아니라, 조심히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제목대로였으면 그냥 심심한 신년맞이였겠지만, 그렇다면 이 글을 적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위험하게 사람이 몰릴 법한 해맞이 명소를 가서도 안 됩니다.

한국이였으면 동해를 떠올리겠지만, 여기서 굳이 해안선까지 가는 여행을 하기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배제했습니다. 잠깐 다녀온다고 태평양 인근까지 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작년의 해맞이는 어디었냐고요? 구름이 잔뜩 낀 에노시마였습니다.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나가와 후지사와의 남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다리로 연결된 섬은 전체가 관광 명소라서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해맞이도 가타세에노시마역까지 사람이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가지도 못하고 작은 개찰구를 통과하기까지 인파에 밀리며 역을 빠져나오는데 한 세월을 보내고, 에노시마 들어가면서도 인파들을 헤쳤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에노시마를 지겹도록 여러 번 방문한 제게는, 지역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듯한 섬의 후미진 둘레길을 이용해서 편안하게 질러서 도착했지요. 섬 주민들의 오토바이가 가득 주차된 나름 물자가 오가는 유일한 찻길이라 안전에는 유의해야 하지요. 그렇게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2020년의 해가 보였었지요.

그런 해맞이 명소는 위험하니까

일본에 와서 누마즈를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때로는 성지순례로, 때로는 시골 탐방을 위한 전진기지로, 스탬프 투어하러, 수족관을 가러 여러 번 갔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도카이도 본선의 15량짜리 긴 열차를 타고 가다가 밖으로 보였던 절벽 아래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관에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나네요.

후지사와를 지나쳐서 치가사키를 지나면 비좁은 절벽을 헤집고 터널과 위태로운 철길, 국도길이 공존하는 구간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 작게 있는 마을에 바다를 떡하니 가로막고 자리를 차지한 유일한 역이 있습니다.

네부카와역은 철조망 너머로 절벽 아래 바다가 보입니다. 바다의 수평선을 열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역이죠. 비록 남쪽 방향이긴 하지만 해를 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탁트인 공간입니다. 저는 여기가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결국 역이란 지나치는 곳이고 철덕이 아니고선 일반인에게 목적지가 될 리가 없으니까요.

예상대로 사람이 많다

5시부터 집을 나서지만 밥은 잘 챙겨먹습니다. 아침밥을 꼭 먹는 습관이라 동행자도 덩달아 먹게 되었는데 속이 안 좋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래저래 준비하다보니 애초에 의도했던 열차는 놓쳤지만 다음 열차로도 대충 목적지 일출 시간에 맞게 도착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오면서 촉박한 환승 시간을 다시 상기합니다.

오다큐 에노시마선 열차가 왔는데 사람들이 꽤 북적북적합니다. 다들 아무래도 이 시국에 에노시마나 최소한 그 근처 해변에 가서 해돋이를 보려고 난리인 모양입니다. 해를 끌끌 차기엔 저도 목적지만 다를 뿐 의도는 별 차이가 없네요. 누워서 침뱉기인 것 같아서 잠자코 마스크를 푹 눌러 쓰고 후지사와역까지 갔습니다.

아침은 고되니까 그린샤 콜

가는 여정에도 일출이 진행되는 열차 시각이라 열차 안에서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서 해변을 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기에, 주저하지 않고 그린샤 발권기를 찾았습니다. Suica 교통카드에 입력하면 자리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처리되어 찍기만 하면 그 자리가 내 것이 되거든요.

하지만 저는 모바일 Suica가 아니라 PASMO였습니다. 카드 인식을 할 수 없었고, 촉박한 환승 시간 와중에 개찰구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밖에 발매기에서 종이 승차권으로 뽑아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플라스틱형 카드가 있었으면 동전 계산하지 않고 카드 잔액으로 뽑았을텐데, 모바일은 삽입이 안 돼서 결국 동전을 써야 하네요. 뽑아서 개찰구를 다시 통과하니 열차가 절찬 진입중이라 후다닥 뛰어서 겨우 열차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빨간색은 활성화되지 않은 자리, 초록색은 활성화된 자리

교통카드로 발권이 되면 천장의 단말기에 찍고 앉으면 됩니다. 2층 객차의 윗층은 역시 뷰가 좋습니다. 유효한 카드는 색이 바뀌면서 내 자리가 되고, 저는 종이 승차권이라 찍을 것 없이 그냥 앉으면 곧 승무원이 와서 표 좀 보자고 합니다. 그 때 표를 보여주면 곧 저도 천장의 자리가 승무원의 기기 조작에 의해 똑같이 초록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리는 딱 바다가 보이는 곳만 들어찼습니다. 두 명이 앉을 자리는 반대편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날이 밝아오는 것이 보여서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은 이미 일출 시각이 갓 지났기에, 구름 너머에 해 끄트머리는 올라왔을 것 같습니다.

모터가 없이 조용한 무동력칸에 그것도 높은 자리에 좌석형 시트에 앉아서 간다는 건, 분명 모든 역에 다 서는 각역정차 열차임에도 뭔가 특급 열차에 탄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특급의 비용을 생각하면 급은 분명 다르지만, 이런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네요. 맨날 쓰기엔 너무 비싼 사치지만요. 주말에 조금 싼 거 보면, 역시 평일에 사람들에 부대끼는 러시 아워를 물리치고 이런 사치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더 많은 걸까요?

사람들의 발상은 어찌 비슷할까

네부카와역은 이미 자리잡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고 한들 나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 이런 전개도 아예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같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죠.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굳이 오지 않았겠지만, 생각해보면 인근 주민들이나 반대로 시즈오카쪽 해변이 아닌 가까운 동네에선 여기가 에노시마보다 더 나은 명소였을 수 있었던 겁니다.

해가 떠오르는 와중에 계획 변경은 없습니다. 다행히 빈 곳은 있어서 충분히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우리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네요.

건너편이 유치선이라 전차선이 다소 거슬리는 각도
찬란하게 떠오르는 2021년 새해

구름 사이로 떠오르면 뭔가 다들 아쉬워하는데, 저는 이쪽이 더 예술적으로 보입니다. 꼭 일출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것보다는, 구름 사이로 뻗어나가는 햇살이 더 아름다워서 그쪽이 더 반갑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모양이 한 해를 설명한다는 미신까지 가진 않더라도, 작년도의 궂은 구름을 걷어내고 떠오른 해와 전례 없는 새로운 판데믹의 출현으로 얼핏 상반되는 결과라고 실망할 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어려움 아래에서 가능했던 또 다른 도전들을 증명해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거든요.

재택 근무라는 상상 속의 일상을 실제로 해보면서 새로운 생활 패턴에 얼마나 성과를 올렸는가 생각해보면, 분명 마냥 좋았다기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개선점도 있었고, 그렇다고 패턴이 엉클어져서 큰 부침을 겪은 것도 아니고, 저와 주변 사람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던 요행도 있었기에 결국 일이 잘 풀렸다는 감사함만 남았습니다.

이번 년도도 딱 그 정도로, 다만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구체적인 미래를 향해 지금까지처럼 현상유지하는 것보다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빌어봤습니다. 돈 좀 아껴써야죠.

네부카와역 이모저모

네부카와역은 수도권 인근의 간이역 규모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역시 역사와 평면 건널목으로 이어질 정도로 낙후된 곳은 아니지만 (열차가 드물지 않으므로 평면은 역시 무리일 겁니다) 역사는 새해 맞이 인파를 다 맞기에는 좀 비좁아보였습니다.

네부카와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도로는 철로를 밑으로 횡단하여 해변으로 갈 수 있는 모양입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그쪽으로 가진 않았지만, 여러 각도에서 역과 바다를 바라본 풍경이 아름답더군요.

역사의 오른쪽은 일부가 창문이 있었지만 막은 듯이 보입니다. 구조가 더 있어보이는데 개조를 통해 역무실을 폐쇄하고 무인역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전자발권기까지 벽에 넣어놨습니다. 발권기가 있는데 승차증명서 발권이 왜 필요한가 생각할 수 있는데, 발권기를 19시가 되면 꺼버린다고 하네요. 야간에 교통카드 없이 승차권으로 열차를 타려면 승차권을 뽑을 수 없으니 저 승차증명서를 뽑아들고 내리는 역에서 정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승차증명서는 일본의 시골 철도에 돈통 싣고 달리는 열차에선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절벽 위는 더 멀리 보일까

역 안에서만 머무르기엔 아쉬워서 조금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등산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하는지라 동행자를 조금 괴롭히는 동선으로 골목길을 헤집고 계단을 올라가봤습니다. 차로는 한참 돌아와야 하는 곳에 지름길을 걸어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길이 길지는 않아서 오르막을 급하게 올라서 끝났습니다. 중학교가 산 위에 있네요. 학생들이 불쌍해지는데 절벽이 있는 해안 동네는 안 그런 곳이 적겠지요. 딱 적당하게 둘러보고 내려가기 좋은 거리여서 좋았지만, 올라가는 수고에 비해 보이는 풍경은 좀 각도가 좁았네요. 그래도 이 동네 전체가 그리 크지 않아서 산책을 하기에도 수십 분이면 가능할 것 같은 규모였습니다.

비록 나만의 스팟은 아니었지만

새해 맞이를 나만의 스팟에서 한다는 야심찬 계획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새해 첫날의 여행이었습니다. 해맞이를 하면 이런 여정이 끝나도 여전히 오전이라는게 참으로 설렙니다. 그래서 욕심을 이후에 부리게 되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2021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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